주의 역사학파와 수정주의 역사학파사이의 논쟁이 중심을 이룬다. 우람(Ulam)이나 가디스(Gaddis)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주의 역사학은(orthodox historian)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적화야욕과 세계지배에 대한 공세정책에 미국이 피치 못해 방어적으로 대응하게 됨에 따라 냉전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소련의 지정
주의적 외교 정책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없는 여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옐친은 가능한 한 미국 중시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비록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직접적인 또는 IMF·IBR
개인숭배와 전제정치에 대해 비판하면서, 무산계급의 독재에 대한 이론을 수정하고 부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구하는 ‘수정주의’를 내세운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무산계급 독재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결속을 공고히 한 스탈린의 공헌을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의 수정주의
미국의 압박을 완화하면서 중국의 역할을 증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또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위해 다자안보체제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서고 있는 중국의 안보정책의 변화들은 그 어느 나라의 정책보다도
세계와 동아시의 지도를 변화시킨 것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관련국들 사이의 역학관계와 개별 국가의 국내외적 입지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 세력 판도는 물론이고 국제정치‧경제의 역학관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 중국은 경제규모에 있어서 미국, 일본에 이은 제3의
하였다. 이러한 세기적 전환과 함께 1989년 이후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구 소련의 체제변화와 붕괴는 세계의 정치‧ 군사 안보적 차원에서 세계와 동아시의 지도를 변화시킨 것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관련국들 사이의 역학관계와 개별 국가의 국내외적 입지를 크게 변화시켰다.
미국과 소위 G2, '차이메리카‘ 로 불리는 등 떠오르는 강국으로서 미국과 협력과 갈등의 줄다리기를 하는 한편 지역 공동체를 이룬 EU와 동아시아의 또 다른 강자인 일본, 그리고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와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진다. 중국이 대외정책을 통해 어떻게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수정주의를 반대하며, 소련의 집권층 중심의 현대 수정주의와는 선을 분명히 긋고, 이들과는 절대로 연합행동을 할 수 없고, 무산계급 국제주의는 중국대외정책의 최고 지도원칙이며, 우리는 아시아·아프리카 및 중남미 각국 인민의 미국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에 대한 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세계
정책 등에 따른 중 ․ 소 분쟁의 심화와 이로
인한 사회주의권의 분열, 중국에서의 문화대혁명 발생과 이에 따른 북 ․ 중간 긴
장국면 조성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내의 의견대립과 갈등에 봉착하게 되었
다. 이에 북한은 자위적 조치로 소련을 '현대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중국을 '교조
주
정책을 내걸었다. 그런데 조선노동당 내에는 경제건설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국방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온건파와 경제건설에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방력 강화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는 강경파의 대립이 있었다. 1967년까지 박금철,이효순,등 실용주의적 온건